{"axis":"file_15150039","total":244,"total_source":"catalog","limit":20,"offset":0,"items":[{"record_key":"h:00feeff553fbfe7f5a7a4695daac7b3c","as_of":"2025-11-26","payload":{"문중명":"의흥예씨","작품명":"淸貧樂道(청빈낙도)","조각가":"이복규","작품설명":"淸貧樂道(맑을청, 가난할빈, 즐길낙, 길도) 청렴결백하고 가난하게 사는 것이 옳은 길이라는 선조 정신을 큰기둥으로 표현하고 좌우로 그 뜻을 받드는 의미를 간결하게 표현함.","문중 유래":"예성(芮姓)의 시조는 고려 문하찬성사 낙전(樂全)공으로, 예부시랑과 보문각 학사를 지내고 경상북도 군위군에 통합된 옛 의흥군(義興郡)을 식읍으로 하는 부계군(缶溪君)에 봉해졌다. 예성은 그 유허지인 의흥(義興)을 본관으로 삼으며 주요 세거지는 청도 수원 상주 밀양 등지에 있다. 7세 사문(思文)공은 고려 창왕 때 양천현감을 지냈고, 조선 성종 대에 가정대부 병조참판 겸 의금부동지사에 추증되었다. 8세 승석(承錫)공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대사간으로 국정의 전면개혁을 상소하였으며 강원도 전라도 관찰사와 공조참판 한성부우윤으로 선정을 하였다. 9세 충년(忠年)공은 경주부윤으로 성덕대왕신종을 거두어 경주성 남문루에 안치하였다. 14세 몽진(夢辰)공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운문산에서 7년간 항전하였고, 15세 인상(仁祥)공은 선조를 호위한 공으로 서훈을 받았으며, 16세 귀주(歸周)공의 효행은 가문을 빛냈다. 근현대에 이르러 24세 준기(俊基)공과 응복(應福)공은 항일 독립운동으로 건국훈장을 받았다. 24세 춘호(春浩)공은 국회 상공위원장을 지낸 3선 의원으로, 삼선개헌과 유신체제에 저항하고 민주화운동으로 어둠 속 등불의 역할을 하였다. 26세 용해(庸海)공은 인간문화재를 창안한 언론인으로 전통문화의 계승발전에 기여하였다. 예성(芮姓)은 청빈낙도의 삶과 올곧은 선비정신으로 정의로운 길을 걸어왔다. 이러한 전통을 후세에 전하고자 그 가풍과 유래를 여기에 새긴다.","한글 성씨명":"예","한자 성씨명":"芮"},"last_seen":"2026-09-21 05:49:44.554725+09"},{"record_key":"h:025d815b4e7788eb0d41a65de4a87b59","as_of":"2025-11-26","payload":{"문중명":"양씨","작품명":"애족(愛族)의 길","조각가":"회일","작품설명":"좌대는 제주도, 좌대위의 산 모양은 한라산, 세 개의 봉우리는 삼성혈, 원석은 백록담, 상단에 성화를 두 손으로 받든것은 양문을 상징한 것으로써 제주도 한라산 정기를 받아 탐라국을 개국한 양을나 시조의 후손은 백록담처럼 영원하며 성화같이 온 누리를 밝혀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며 번창함을 기원함에 뜻에 있다.","문중 유래":"  양씨(梁氏) 시조(始祖)는 제주도 삼성혈(三姓穴)에서 나와 탐라국을 개국(開國)한 양을나(良乙那) 이다. 중시조(中始祖) 탐라국주 양탕(梁宕)이 신라 내물왕 때 입조하여 선린외교를 하였고, 그 때부터 양(良)성(性)을 양(梁) 성(性)으로 쓰게 되었다. 제주양씨(濟州梁氏)는 한라군 순(洵)이 신라 신문왕때 한림학사에 봉해졌고, 고려 태조 때 성주왕자를 봉작 받은 구미(具美)가 성주공파(星主公派), 고려 명종 때 유격장군이 된 보숭(保崇)이 유격공파(遊擊公派), 각각 기세조(起世祖)이다. 남원양씨(南原梁氏)는 우량(友諒)이 신라 경덕왕 때 남원부백에 봉해졌고, 고려 성종 때 병부랑중 동궁내 시강학사에 오른 능양(能讓)이 병부공파(兵部公派), 고려 원종 때 찬화공신 용성부원군에 책봉(策封)된 주운(朱雲)이 용성군파(龍城君派), 고려 충선왕 때 대방부원군에 봉해진 수정(水精)이 대방군파(帶方君派), 각각 기세조(起世祖)가 된다 충주양씨(忠州梁氏)는 고려 태조 때 삼한통합대장군이 되고 예성부원군으로 훈봉받은 능길(能吉)이 예성군파(蘂城君派) 기세조(起世祖)이다. 이처럼 제주, 남원, 충주로 본관이 나누어졌으나 근원은 한 뿌리에서 내려온 혈족이다. 고려시대 성주공 호(浩), 조선시대 증 영의정 여공(汝恭), 대제학 문양공 성지(誠之), 청백리 일로당 관(灌), 대사간공 사귀(思貴), 학포 공팽손(彭孫), 소쇄처사 산보(山甫), 임진왜란 때 충장공 대박(大樸)장군, 병인양요 때 충장공 헌수(憲洙)장군,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전백(甸伯), 한묵(漢 ), 임시정부 때 독립운동가 기탁(起鐸), 세봉(世奉), 기하(基瑕), 문학박사 주동(柱東), 민주통일당총재 일동(一東)이 양씨문중(梁氏門中)을 빛낸 훌륭한 선조이다.","한글 성씨명":"양","한자 성씨명":"梁"},"last_seen":"2026-09-21 05:49:44.554725+09"},{"record_key":"h:02c0a0a5431e3afc1a316288ec59a0d6","as_of":"2025-11-26","payload":{"문중명":"야성송씨","작품명":"충 · 효 - 滿 開","조각가":"전자선","작품설명":"충절과 독립운동에 앞장선 선조들의 업적을 후손들이 존경심과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상징화 하였다.\r 좌우 기둥형태는 선대와 후대의 공존과 상승구도로 형상화 하였으며, 상단의 작품형태는 5개파를 상징하여 \r 선조들의 효와 충절이 만개한 꽃처럼 영원한 번영을 이룰 수 있도록 조형화 하였다.","문중 유래":"야성송씨의 본관(本貫)은 경남 합천 야로현으로 지금의 합천군 야로면 구정리이다. 시조공(始祖公) 휘(諱) 맹영(孟英)께서 고려 목종 때 (997-1009) 간의대부의 품계와 총부의랑의 벼슬로 야성군(冶城君)으로 봉(封)해지면서 식채로 받은 곳이다. 야성은 야로의 고려 때 지명이다. 창씨는 천년의 긴 역사를 가졌지만 유감스럽게도 상대(上代) 9세까지의 분산(墳山)을 실전(失傳)하게 되어 유지로 알려진 합천군 야로면 구정리에 1941년 봄 9세까지의 신위를 모신 제청과 망묘단비를 세워 구정재(九政齊)라 편액(偏額)하고 한식에 세제(歲祭)를 올리고 있다. 10세에 이르러 절도공파(節度公派)와 감사공(監司公)파로 분파되니 절도공 분묘도 실전되어 칠곡 도촌에 망묘단비를 세우고 음력10월 1일 향제하고 후손 사직공파는 칠곡에 첨정공파는 성주에 선략공파는 용인 등지에서 살고 있으며, 감사공이하 5세는 성주 회동의 선영하에 1656년 제실 추원당을 세우고 음력 10월 5일 묘제를 올리고 직장공파 후손은 성주에 상호 군공파는 산청에 대호군공파는 대구에 현령공파는 영주에 선전공파는 칠곡등지에 살고 있다. 우리 야성송문은 11세 길창(吉昌) 선조까지는 고려조에 12세 이후는 조선조에서 많은 대소과에 등과해서 여러 관직에 봉직했으며 15세 눌제(訥齊) 석충(碩忠)공께서는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김종직(金宗直) 문하에서 동문수학 하면서, 한국 성리학 맥을 잇는데 기여를 했으며, 16세 야계(倻溪) 희규(希奎)공은 투철한 충효 사상으로 많은 업적을 남기고, 을사명현으로 후에 이조판서로 증직되고, 고종 8년에 충숙의 시호를 받고, 불천위로 모시고 있다. 그 후 구한 말 성주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공을 세운 이력은 역사 사료에 남아 있기도하다. 우리 야성 송문의 조상님들은 어느 문중 못 지 않는 투철한 충효정신과 도덕을 몸소 실천 하시고, 그 숭고한 정신을 우리 후손에게 남겨 주셨다. 능력 있는 사람은 긍지가 있고, 긍지를 가진 사람은 훌륭한 조상을 뫼시고 있는 법이다. 이제 우리는 훌륭한 조상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실천하고 후세에 물려줘야 할 것이다. 여기 우리 조상에 얼을 담은 조형물 설치를 계기로 투철한 숭조정신과 혈친 돈목에 최선을 다해 야성송씨 문중의 무궁한 발전을 전종원과 함께 기원한다.","한글 성씨명":"송","한자 성씨명":"宋"},"last_seen":"2026-09-21 05:49:44.554725+09"},{"record_key":"h:03a9974995b20486de74f1fb559164ad","as_of":"2025-11-26","payload":{"문중명":"충주/홍주석씨","작품명":"영원(永遠)한 가족(家族)","조각가":"김학제 (동아대학교 예술대학교수)","작품설명":"굳건한 주춧돌의 상징인 세 기둥과 이것을 화합하는 삼각형의 화강석 위에 어깨동무하고 있는 인물과 불꽃의 정동조각을 배치하여 영원히 발전하는 성씨(姓氏)의 미래를 조형화 하였다.","문중 유래":"시조 석린(石隣)은 중국에서 고려로 와서 의종 경인란(1170년)과 명종 병신란(1176년)을 평정한 공으로 성장군에 올라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졌다. 그후 봉군지(封君地) 예성(현:충주)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6세(世)는 양선(良善)이요 배(配)는 영흥 최씨니 영흥백 정효공(靖孝公) 한기(閒奇)의 따님이며 이태조대왕의 이모(姨母)이다. 태조가 생후 5개월만에 어머니(의혜왕후)를 잃고 이모의 젖을 먹고 자랐다. 태조가 왕위에 오르지(1393년)이모부 석양선을 홍양부원군, 이모 최씨를 경창옹주에 봉하였고 7세 중랑장 석천을에게 '동유형제의 여산여해은'(同乳兄弟誼 如山如海恩)이라는 어필(御筆)을 내렸다. 8세 수명과 여명 두형제 중 형 수명은 한성판윤으로 조부 홍양 부원군을 딸 관향을 홍주로 분관하였으며, 동생 여명(汝明)은 관향을 충주로 계속 이어왔다. 여명의 호는 화원(花園)이며, 공민왕23년(1374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문하주서였으나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벼슬을 버리고 두문불출하니 태조가 여러번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그후 태종 16년(1416년) 왕지로 한성윤 집현전제학(漢城尹 集賢殿提學)에 임명하였으나\"고려의 신하로서 조선왕조를 섬길수 없다\"라고 불응하니 태종이 진노하여 충주 차의산 회문동에 귀양보내니 그곳에서 종신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태종은 후회하며 \"한점 부끄럼없는 높은 지조를 갖춘 훌륭한 충신\"이라며 좌찬성에 증직하였다. 우리는 이 높은 충절의 정신을 이어받아 국가에 충성하고 정의를 지향하여 나라발전에 기여하여야 할 것이다.","한글 성씨명":"석","한자 성씨명":"石"},"last_seen":"2026-09-21 05:49:44.554725+09"},{"record_key":"h:049fa66b304136971713c84eac68795c","as_of":"2025-11-26","payload":{"문중명":"양주조씨","작품명":"충효단忠孝壇","조각가":"이영섭","작품설명":"이 충효단忠孝壇은 양주조문楊州趙門이 배출한 충절忠節과 효자孝子를 표현한 상징물이다. 국력國力이 약했던 근대 한국 대한제국大韓帝國이 1905년 일본국 日本國에 의하여 강압적인 방법으로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대한제국 원임의정 대신原任議政大臣 충정공忠正公 조병세趙秉世선생이 충정공 민영환閔泳煥선생 등 문무백관文武百官을 거느리고 을사늑약乙巳勒約을 반대하며 을사오적을 처형하고 조약條約을 파기토록 고종황제高宗皇帝께 상소하였으나 비답批答이 없고 일본군헌병日本軍憲兵에게 저지당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자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황제皇帝께 상소하고 국민과 주한 각국 공사에게 호소문을 남기고 순국殉國한 선열先烈의 뜻을 국민國民들이 알아야 할 한국韓國의 근대사近代史를 작품에 담은 것이다.","문중 유래":"  양주조씨(楊州趙氏)의 근원지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북구 번동인데 선계(先系)는 실전되어 상고 할 길이 없다. 시조(始祖)로 모시는 조잠(趙岑)은 고려(高麗)때 양주호장(楊州戶長)을 지내고 판중추원사를 증직받은 판원사공(判院事公)인데 조지말(趙之末)의 후손으로 군우(君佑)의 손자 경질(景質)의 아들이라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양주조씨는 판원사공 1세조 잠과 2세조 호판공 인필(仁弼) 3세조 서운관정공(書雲觀正公) 의(誼)로 3대에 이르기까지는 독신으로 선계(先系)가 이어 왔으나 서운관정공 조의(趙誼)는 고려조충신(高麗朝忠臣)으로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맏이가 정평공(靖平公) 조계생(趙啓生)이 이조판서 예문관 대제학, 강화공(江華公) 조유중(趙惟中)이 강화부사 불가(佛家)로 귀의한 조설우대사(趙雪牛大師), 문강공(文剛公) 조말생(趙末生)이 영중추원사 예문관 대제학, 제학공(提學公) 조종생(趙從生)이 병조참판 제학을 지냈는데 5형제의 아들중 문강공 말생(末生)의 후손이 가장 많이 번성하여 양주조씨(楊州趙氏)중 다수의 후손인구를 이루고 있다. 정평공(靖平公)은 아들 병조판서 극관(克寬), 평안도관찰사 수량(遂良), 제학공(提學公)은 아들 병기녹사 번(藩)과 손자 계동(季同), 향동(香同), 귀동(貴同) 등이 조선(朝鮮) 단종조(端宗朝) 계유정난(癸酉靖難)때 목숨을 잃어 후손의 인구가 적다. 양주조씨(楊州趙氏)는 조선조(朝鮮朝)에서 문과급제 97인, 무과급제 71인, 생원진사 244인, 상신(相臣) 8인, 대제학 5인, 인조장열왕후(仁祖莊烈王后)를 배출하고, 국구 1인, 의빈 2인, 청백리 1인, 충절 13인, 효열 32인, 재상급 26인을 비롯하여 천여명의 관료가 나온 조선시대를 통하여 명문벌족(名門閥族)으로 이름을 얻은 가문(家門)으로, 특히 1905년 대한제국(大韓帝國)때 을사늑약(乙巳勒約)을 반대 상소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순국(殉國)한 원임의정대신 충정공(忠正公) 조병세(趙秉世)선생은 양주조문(楊州趙門)의 명예를 선양한 인물(人物)이다.","한글 성씨명":"조","한자 성씨명":"趙"},"last_seen":"2026-09-21 05:49:44.554725+09"},{"record_key":"h:0592543cdb598b7dee929f71d6af99e8","as_of":"2025-11-26","payload":{"문중명":"강릉김씨","작품명":"역사와 나","조각가":"이재영","작품설명":"작품 ‘역사와 나’ 는 뿌리공원의 근본취지에 걸맞게 구상하여 제작된 작품으로, 작품을 멀리서도 고서의 형태를 인지하고 강릉김씨의 역사와 뿌리를 연상케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가까이에서 작품을 감상 할 때에는 강릉김씨의 유래문을 볼 수 있어 이를 통해 더욱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강릉김씨의 유래와 선조들의 뿌리를 인지할 수 있다. 강릉김씨의 시조인 김주원을 상징하는 왕관과 알천을 통하여 겸손한 선조의 정신을 알리고 후손들이 자신의 성씨에 대한 자신감을 갖도록 하였다. 작품을 수직적으로 배치하여 하늘과 땅,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성씨 조형물의 가교적인 역할을 상징하였으며 중심에 위치한 알천줄기를 표현한 부분은 시조의 정신과 후손의 화합 결속을 의미하였다. 펼쳐진 고서는 현재에도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며 역동적으로 이어지는 강릉김씨의 활동력을 표현하였다.","문중 유래":"  시조 명주군왕은 신라 김씨의 시조 알지(閼智) 대보공의 21세손으로 신라 37대대 선덕왕이 후사 없이 서기 785년에 승하하여 당시 시중 겸 병부령(지금의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인 주원(周元)공을 왕위에 오르도록 군신회의 에서 결의했으나 주원공의 저택이 경도의 북쪽 20리에 있었는데 때마침 큰비가 내려 냇물이 넘쳐 건너지 못하자 인군(人君) 자리는 잠시도 비울수 없다 하고 당시 상대등인 김경신(金敬信)공이 왕위에 오르게 되니 이가 신라38대 원성왕이다. 주원(周元)공이 비가 개인 후 임상(臨喪)차 단기(單騎)로 입궁(入宮)하니 왕위에 오른 김경신(金敬信)이 주원(周元)공에게 왕위(王位)에 오르기를 권(勸)했다. 하지만 주원공은 인군대위(人君大位)는 천명(天命)이라 하며 사양하고 어머니의 고향인 명주로 퇴거했다. 그로부터 2년 후 원성왕은 왕위를 양보한 덕을 생각해 명주(강릉)를 중심으로 강릉, 울진. 평해, 삼척 등 동해안 일대를 분할하여 다스리게 하고 명주군왕으로 봉하였다. 이때부터 명주도성을 중심으로 세습통치 하면서 자손이 번성하여 강릉김씨로 득관 하고 명문거족의 발상지가 되었다. 가문을 빛낸 후손으로는 조선 세조의 패륜에 저항하며 절의를 지킨 생육신으로 <금오신화><매월당집><십현담요해> 등의 명작을 남긴 매월당 김시습(金時習) 등이 있다.","한글 성씨명":"김","한자 성씨명":"金"},"last_seen":"2026-09-21 05:49:44.554725+09"},{"record_key":"h:06409b087032b61f6a3867fd91f6314d","as_of":"2025-11-26","payload":{"문중명":"광주김씨","작품명":"번영과 화합","조각가":"김복규","작품설명":"조형물 상단의 힘차게 상승하는 모습은 빛내주신 선조의 행적, 시조로부터 지내온 위인들의 업적과 미래\r 후손의 발전을 위해 \"장군\"의 형상으로 표현하였다.\r 전체적인 형상은 조상을 높이 받들고 종친의 발전을 바라는 모습으로 광주김씨 가문의 랜드마크가 되기를\r 바란다. 문중의 위상과 기계를 초석삼아 현재까지 이어오는 선대의 업적을 기리고 본받아 가문의 영광을\r 후대에도 자자손손 널리 뻗어 나아가는 문중이 되기를 바란다.","문중 유래":"廣州金氏는 신라 경순왕의 5자 의성군 석(義城君 錫)의 7세손인 녹광(祿光)공이 상장군으로서 고려 고종 23년 광주군(廣州君)에 봉작됨에 따라 관향으로 발상하였다. 2세 굉(?)은 감찰어사를 지냈으며, 3세 훤(?)은 고려 후기의 명유(名儒)로서 문하찬성사로 현달하였다. 찬성공의 장자는 남물(南物)이요 증손 곤수(昆壽)의 장자 차문(次文)은 공조 참의로, 참의공의 아들 경보(敬寶)는 상주목사로 제수되었고, 목사공의 증손 기(琦)는 임진왜란에 의병을 일으켜 동래성을 사수하다 순절하여 어모장군 훈련원정에 증직되었으며 목사공의 다른 증손 우정(禹鼎)은 왜란 당시 포로가 되어 적지에서도 8년 동안 절의를 지켰고 후에는 학문에 정진하였다. 참의공의 아우 차무(次武)는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을 제수받았으며 승지공의 아들 려(礪)는 장례원 판결사를 역임하고 밀양 지방에 세거하게 되었다. 판결공의 장자 희증(希曾)의 아들 태허(太虛)는 임진왜란 시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 1등공신과 경상좌?우도병사, 충정병사, 도총관, 호위대장을 거쳐 지충추부사에 이르고 양무(襄武)란 시호를 받았다. 양무공의 아들 수겸(守謙)도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 2등 공신에 책록되고 안동영장, 중추부사를 역임했다. 판결공의 차자 희로(希魯)의 아들 태을(太乙)은 은덕궁행(隱德窮行)의 석유(碩儒)이며 태을의 차자 수인(守?)은 성균생원으로서 광해군때 영창대군의 옥사가 일어나자 홀로 궐하에서 전은소를 올리고 석고대명하였으나 비답이 없으매 “명륜당상 미명륜”(한자)이란 시를 남기고 낙향한 유현(儒賢)이다. 찬성공의 차자 개물(開物)은 황해지방을 세거지로 삼았으며 아들 섬(?)의 6자 필수(筆壽)는 고려말 부제학으로서 조선이 개국함에 불사이군의 정절로 은거하여 후손이 덕천지방에 세거하게 되었다. 곽산 능한성에서 순절한 옥경(玉京)의 후예가 정주· 영변에 세거하였고, 관서지방으로 북상한 3세 태(兌)를 중시조로 하는 일족이 철산지방으로 이주하여 세거하였다. 절의와 효제를 대대로 지켜온 명문으로서 근대에는 상윤(相潤) 영복(榮宓) 규환(奎煥) 석창(錫昌) 승문(勝文) 용능(用能) 진성(振聲) 등이 각기 항일 독립운동에 순국하고 혹은 헌신하여 국가가 서훈하였다.","한글 성씨명":"김","한자 성씨명":"金"},"last_seen":"2026-09-21 05:49:44.554725+09"},{"record_key":"h:064db565f1963e024c290304ba281d75","as_of":"2025-11-26","payload":{"문중명":"제주고씨","작품명":"탐라의 기상(氣像)","조각가":"고창환","작품설명":"본 조형물은 탐라왕국 역사인 제주도를 한라산 형태로 디자인 하였으며 고씨 종문을 상징하는 종문 심볼을 후손들이 화합과 단합으로 받들어 종문의 발전을 기원하고 받침대 구(球)는 3신인(神人)중 시조 고을나 왕을 추상적으로 표현함.","문중 유래":"▸ 우리 고씨는 제주도 고.량.부(髙.良.夫) 삼성(三姓) 신화와 탐라왕국의 시조 고을나왕(髙乙那王)의 역사가 있으니 자랑스러운 왕손(王孫)이다. 고씨 왕세기(王世紀)는 당요갑자(唐堯甲子)에 탐라국이 건국되어 제45대 고자견왕(髙自堅王)까지 왕치(王治) 시대를 통치하고, 고려(太祖21年)에 병합됨에 제46대 왕자 고말로공(髙末老公)이 초대 성주(星主)로 작위(爵位)를 받고 탐라 민정을 조선태종(朝鮮太宗 2年)때 제17대 성주 고봉례공(髙鳳禮公)까지 다스렸다. 이처럼 고씨는 상고시대부터 유구한 전통의 기반위에 고을나왕 제46세(世) 고말로 공을 중시조(中始祖)로 모시고 아홉계파의 관향(寬鄕)으로 분파(分派)되고 있는데 각 파조(派祖)님의 역사적 인물을 조감해 볼때 최초에 고려국 재상반열에 출사한 중시조 제2세 장자 고유는 우습유(右拾遺), 차자 고강은 좌복야(左僕射), 삼자 고소는 도총독(開城府都摠督)을 하였으며 제3세손 고조기는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제4세손 고공익은 검교장소감(檢校將少監), 고영신은 이부상서(吏部尙書), 제10세손 고인단은 운휘상장군(雲麾上將軍), 고중연은 호종공신(扈從功臣), 제11세손 고경은 국자감(國子監), 고인비는 병부시랑(兵部侍郞), 제13세손 고택은 판춘추관사(判春秋館事), 고신걸은 호조전서(戶曹典書), 제15세손 고득종은 세종조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선조(宣祖 25年)때 임진란에 순절한 의병장(義兵將) 충열공 고경명 삼부자 공은 일문삼강(一門三綱) 충효의 귀감이고, 또한 제주 삼성사(三姓祠)를 비롯한 각 파조 신위를 봉안한 사묘(祠廟)와 서원(書院)이 경향 각지에 36처소가 있으며 특히, 중시조를 비롯 13위(位) 조상님과 배위(配位)의 제향(祭享)을 군산 숭모사(崇慕祀)에서 그리고 제주 제궁지(濟州 劑宮址) 탐라원 성지(耽羅苑聖地)에 왕위전(王位殿)과 성주전(星主殿)을 창건하여 역대 선왕위를 봉안 매년 종묘대제향(宗廟大祭享)을 봉행하고 있다.","한글 성씨명":"고","한자 성씨명":"髙"},"last_seen":"2026-09-21 05:49:44.554725+09"},{"record_key":"h:06944fb124575a5f30357169f3877f4c","as_of":"2025-11-26","payload":{"문중명":"낭주최씨","작품명":"지조와 절개","조각가":"최규철","작품설명":"월출산의 돌출함을 표현.\r 반원혈의 대나무 : 人을 표현, 조상의 높은 뜻, 서로 소통하는 통로이자 지조와 절개의 표상으로 현대조형의 흐름에 따라\r 단순화한 것, 원형 전체의 윤곽으로 조상의 얼과 후손들이 융통무해하게 소통을 표현.","문중 유래":"낭주최씨는 중국 제(齋)나라 태공망 후예가 최씨성을 얻었고 그 후손이 월출(月出) 낭주(朗州)골 성기동 영암(靈巖)의 너른 들판에 신라때부터 살아옴으로써 낭주(朗州) 최씨(崔氏)가 되었다. 시조 흔(昕)은 신라 진성왕 때 원보상이었고, 후손 지몽(知夢907-908)은 왕건과 함께 고려를 세운 공로로 민휴(敏休)란 시호를 받았으며, 내의령, 내사령(內史令: 현 총리), 상주국에 이르렀다. 낭주 최씨(崔氏)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 주요 성씨로서 각 향 각 계에서 조국과 민족의 앞날을 밝혀주는 횃불이 되고 있다.","한글 성씨명":"최","한자 성씨명":"崔"},"last_seen":"2026-09-21 05:49:44.554725+09"},{"record_key":"h:0a37c99f5af7dd7c1b0362808283404d","as_of":"2025-11-26","payload":{"문중명":"금산김씨","작품명":"웅비(雄飛)","조각가":"김 지 삼 (한국조각가협회이사)","작품설명":"두사람의 인체에 직선과 곡선을 사용한 것은 강함과 부드러움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 서로 화합하고 단결을 나타내며 두팔을 크게 벌림은 금산김씨(錦山金氏)의 자손들이 힘차고 용기있게 나가 세상을 표용함을 나타내며 삼각형구도를 이루는 것은 안정속에 금산김씨(錦山金氏)의 자손만대로 번영과 발전을 기원하는 의미를 나타냄.","문중 유래":"시조 김신(金侁)공은 신라 경순왕의 제4자 은열(殷說)공의 제15세 손으로 자(字)를 윤직 호(號)를 낙천제(樂天齊)라 하며 고려 고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좌정언(司諫院左正言)을 거쳐 원종8년 정묘(丁卯 1267年)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왕을 호종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원제로부터 정서대원수의 대임을 받아 만노(萬奴)의 여환(余患)을 제하고 또 강서인주적(江西 鱗州賊)을 토평한 공으로 금자광록대부 요양성참정(金紫光祿大夫 遼陽省參政) 에 제수 되었다. 원종11년 경오(庚午)에 귀국하니 공이 재원시에 국가를 위하여 공헌한 바 크므로 공의 고향인 진예현(進禮縣)을 금주(錦州)로 승격하여 금주군(錦州郡: 現錦山)에 봉(封)함으로 본관(本貫)을 금산(錦山)으로 정하였다. 계유(癸酉)에 상장군 평장사(平章事)에 임명되어 하절사(賀節使)로 원나라에 다녀오고 갑술(甲戌)에 좌군사(左軍使)로 중군사 김방경(金方慶)과 왜국정벌 (倭國征伐)에 참전 하였다가 일기도(一岐島)에서 전사(戰死)하니 시호(諡號)를 충간공(忠簡公)이라 하고 칙명(勅命)으로 사당(황풍사)을 세우고 향사(享祀) 케하여 리명(里名)도 황풍리라 칭한다. 또 무주 유림이 죽계서원에서 향사를 하고 있다.","한글 성씨명":"김","한자 성씨명":"金"},"last_seen":"2026-09-21 05:49:44.554725+09"},{"record_key":"h:0ac21a35c5f37d077c6e929e94f7f642","as_of":"2025-11-26","payload":{"문중명":"풍양조씨","작품명":"메신저(messnger)'97뿌리","조각가":"조 성 묵 (전업 조각가)","작품설명":"흰색 화강석은 현대(現代)를, 검은 오석은 고대(古代)를 상징하고, 날카로운 모습을 하고 있는 삼각형 구조의 청동 조각은 현대와 고대의 시간에 서 있는 우리세 대와 뿌리 의식을 함께 투영한 예술적 작품임.","문중 유래":"풍양조씨의 발상지는 고려시대 풍양현이니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이다 신라말기에 바위 라는 은자(隱者) 한분이 천마산 지맥인 독정산(獨井山)의 암굴(巖窟)에서 수도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고려 태조 왕건이 찾아가 장군을 삼으니 보령 70세였고 모습이 웅위하고 수염이 아름다웠다. 태조의 남정(南征)에 여러 차례의 공을 세워 개국공신이 되고 맹(孟)이란 이름을 하사 받았으며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러 풍양조씨의 시조가 되었다. 풍양조씨는 고려시대에 중간 세계(世系)의 실전으로 전직공파(殿直公派) 평장공파(平章公派. 南原公派)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가 계파를 달리하며 전직공파는 다시 호군공파(護軍公派) 회양공파(淮陽公派) 금주공파(錦州公派)로 분파되어 5대파로 불러온다 고려시대에도 벼슬이 이어졌고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더욱 현창하여 문과 180여명에 정승7명 문헌4명 왕비2명을 비롯하여 많은 문무백관과 도덕문장이 배출되어 우리나라 성씨의 명문으로 일컬어진다. 현재에도 국내외의 각 계층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뛰어난 인재들이 많으므로 계속 무궁한 발전이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1994년 7월 풍양조씨 대종회장 조광희","한글 성씨명":"조","한자 성씨명":"趙"},"last_seen":"2026-09-21 05:49:44.554725+09"},{"record_key":"h:0bf525ca22fb9b9c00fc48c26852ecdb","as_of":"2025-11-26","payload":{"문중명":"대흥이씨","작품명":"생명의 씨앗","조각가":"최영근 (한남대학교 응용미술과교수)","작품설명":"생명의 근원이 되는 씨앗을 상징하며 문중의 탄생 번영을 담아 인류발전에 빛이 되리라는 염원을 담았다.","문중 유래":"대흥군(大興君) 이연계(李連桂)는 전주 이씨 22세에서 분관한 대흥이씨(大興李氏)의 시조이다. 대흥군은 고려말기에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정3품)과 명나라 관직으로 이부상서(吏部尙書)를 지냈다. 대흥군은 태조 이성계와 재종간 임에도 불구하고 불사이군의 절의를 굽히지 않고 끝까지 조선 개국을 반대 하였다. 결국 간신들의 참소를 받아 양양(襄陽: 경북 예천군)으로 귀양을 갔다. 높은 절의응 가상히 여긴 태종(1403년)은 귀양살이를 풀어주면서 대흥군으로 봉하였지만 봉군 을 마다하고 대흥땅(現: 충남 예산군 대흥면)을 떠나 다인 고현(現: 경북 의성군 다인면)으로 물러나가 살았다. 대흥군은 고려를 구하지 못한 망국지신을 자처하며 학식과 재덕을 스스로 감추어 갈포베옷만 입고 지내다가 1407년에 일생을 마쳤다. 자손에게 유언하기를 \"내 자손은 반드시 대흥(大興)으로 관향(貫鄕)을 삼을 것이며, 내가 죽은 후에는 지문(誌文)과 묘갈(墓碣)을 쓰지 말라\"고 하였으니 그 유지(遺志)는 곧 고려를 구하지 못한 죄인의 글은 내세울것이 못된단는 절의정신을 일깨워 준 것이다. 대흥군의 부인은 개성왕씨 삼중대광 도첨의(三重大匡 都僉議) 영(泳)의 따님이며 삼형제를 두었다. 큰아들 손귀(孫貴)는 고려조에서 용주부사(龍州府使)응 역임하였으나 조선건국후에는 부친의 뜻을 받들어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후손은 경북의성 부사공파(府使公派)와 황해도 평산 청헌공파(淸軒公派)이다. 둘째 아들 손정(孫禎)의 후손은 평북 박천 초산의 송재공파(松齋公派)이고 셋째아들 좌찬성(左贊成) 손현(孫賢)의 후손은 전남 담양과 경기도 강화의 충숙공파(忠肅公派)이다. 시조의 묘소는 경북 의성군 다인면 송호리 다기산(多岐山)이며 음력 10월 13일에 향사를 올린다. 무인년 새봄을 맞아 시조의 정의로운 충절과 고귀한 유덕을 계승 발전하고자 자손들이 정성을 한데 모아 기념비를 건립한다. 1998년 5월 10일 全國大興李氏宗親會","한글 성씨명":"이","한자 성씨명":"李"},"last_seen":"2026-09-21 05:49:44.554725+09"},{"record_key":"h:0ecda89fa403fd48ed54acc1a0c69bd8","as_of":"2025-11-26","payload":{"문중명":"울산박씨","작품명":"울산의 비상","조각가":"박건규","작품설명":"울산박씨(蔚山朴氏) 시조 윤웅과 지금의 울산의 지역적 이미지를 조형화하여 구상하였다.\r 전체적인 형상은 한글 울산 글자를 조형적으로 해석하여 울산박씨의 이미지를 담고자 하였다.\r 상부는 오석 구 형태는 문중의 희망과 미래를 상징하고, 지역의 대표적인 고래의 형상과, 문중의 학산서원의\r 메시지를 담았다.\r 미역바위는 울산광역시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되어 울산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울산박씨를 대표하는\r 미역바위 형상과 산과 바다의 파도형상으로 이미지화 하였다.\r 선조에 대한 역사성과 존엄성을 부각시키고 예술성을 극대화 시키고자 하였다.\r 본 작품으로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창조, 발전시키고 문중의 위업(衛業)과 후손들의 자긍심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문중 유래":"울산박씨는 본관이 흥려(興麗)였으나 조선 태종(朝鮮 太 宗) 13년(1413)에 지명(地名)이 흥려부(興麗府)에서 울산 (蔚山)으로 개칭되었다. 울산박씨 시조(蔚山朴氏始祖)는 흥려백 시호 장무공 휘 윤웅(興麗伯諡號莊武公諱允雄)이시다. 공은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신학성장군이라 칭 하여 신라 하곡현(울산중구학성)일대를 통치하던 호족장이었다. 고려개국(918)시 태조를 도와 개국공신에 올랐고 후삼국 통일에 큰 공을 세워 통치하던 동진(東津).하곡(河曲). 동안(洞安). 우풍(虞風). 임관(臨關)등 5개 군현(郡縣)을 통합하여 흥려부(興麗府)로 승격(울산시는 이날 10월 1일을 울산 시민의 날로 제정함)시켜 공(公)을 흥려백(興麗伯)에 봉작하여 숭록대부대장군에 배명되고 통합 삼한 벽상공신에 녹훈되어 통치하던 전 지역을 사패지(賜牌地)로 하사(下賜)받았다. 사패지 일부인 미역바위 12구중 1구(區)가 천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보존되어 서기 2001년 12월 20일 울산광역시 지방문화재(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되어 우리 종중에서 관리하며 여기서 생산되는 미역을 매년 공의 향제 시 제수(享祭時祭需)로 진공(進貢)하고 있다. 고려 문종이래 공의 신주를 성황당(城隍堂)에 모셔 계변천신(戒邊天神)으로 숭앙(崇仰)하여 수호신(守護神)으로 받들고 있다. 그러므로 공은 오늘의 울산을 있게 한 원훈(元勳)이시며 그 공업(功業)은 동해의 물결 아래 저 곽암(藿巖)과 함께 천여년 세월 속에서 빛나고 있으며 만세에 불후(不朽)하리로다.","한글 성씨명":"박","한자 성씨명":"朴"},"last_seen":"2026-09-21 05:49:44.554725+09"},{"record_key":"h:100b90fa8bcb9a2a0181755536b3a072","as_of":"2025-11-26","payload":{"문중명":"경주최씨","작품명":"번영(繁榮)","조각가":"현 광 덕(玄光德)","작품설명":"최(崔)자를 형상화하여 만든 것으로 산(山)자 모양으로 타오르는 성화이며 번창함을 상징한다.우측의 뾰족한5점은 새추자의 윗점과 우측4획을 합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수많은 후손들의 힘을 하나의 큰○로 모아 번영과 화합과 단결을 나타내고 있다. \r 유래문지은이 문학박사 崔謹默\r 설치년도:1997. 8","문중 유래":"경주최씨는 최씨의 대종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유래를 지닌 씨족의 하나다. 최씨의 원조는 신라의 전신으로 경주에 자리잡은 사로국 6촌의 하나인 돌산고허촌 (突山高墟村)의 촌장 소벌도리공(蘇伐都利公)이시다. 신라를 세운 원훈(元勳)으로 법흥왕 3년에 충선공(忠宣公)으로 시호(諡號) 받았고 태종무열왕 3년에 문열왕 (文烈王)으로 추봉(追封)되셨으며 유리왕 9년에 최씨(崔氏)로 사성받았다. 이것이 성을 갖게 된 유래이다. 경주최씨의 시조는 소벌도리공의 24세손인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선생이시다. 오늘날 거의 모든 최씨의 분파는 고운선생을 1세로 하는 경주최씨에 그 연원(淵源) 을 두고 있다. 고운 선생은 12세의 어린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에 과거에 합격하시고 그 후 여러 관직에 있으면서 많은 글을 지었는데 이 가운데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 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다. 귀국하여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문란한 국정을 바로잡기 위하여 시무책 10여조의 개혁안을 제시하여 아찬에 올랐다. 그후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실망하여 관직을 버리고 소요자방(逍遙自放)하시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치셨다. 고운 선생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지성이요 한문학의 조종이며 절세의 명문으로 명성을 천하에 떨친 분이시다. 문집으로 계원필경(桂苑筆耕)과 그밖에 많은 명저를 남기셨다. 고려 현종때 내사령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어 문창후(文昌侯)에 추봉 되셨다. 경주 최씨는 시조 이래로 그 후손들이 번창하여 역사상 숱한 명현 학자 관인 장상을 배출하여 도덕문장(道德文章)과 절의훈벌(節義勳閥)이 찬연한 명문거족이 되셨다. 경주최씨는 명가의 후예로서 높은 긍지를 가지고 오늘날에도 국가와 사회에 헌신 봉사하면서 조상의 빛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한글 성씨명":"최","한자 성씨명":"崔"},"last_seen":"2026-09-21 05:49:44.554725+09"},{"record_key":"h:101cb90482bb94905f4b2a5dd0169de6","as_of":"2025-11-26","payload":{"문중명":"서산정씨","작품명":"숭조(崇祖) 그리고 빛","조각가":"천종권","작품설명":"본 작품은 서산정씨 문중의 호국충절과 문·무를 겸비한 빛나는 업적을 상징하여 서산정씨 문중의 화합과 무궁한 번영을 염원하였다. 상단에는 정나라 환공의 왕관을 표상화 하였으며, 4개의 빛은(부정공, 부원군, 참의공, 사정공) 파를 표현했으며 그림은 강남제일가의 패방문(牌坊門)이고 기둥의 정씨가보는 범중엄(睦州守), 충효전가는 주자(晦翁)의 친필이다.","문중 유래":"서산정씨는 정(鄭)나라 (기원전 806~375년) 왕족의 후손이다. 정나라 시조 환공(桓公)의 64세 회(淮)공이 중국절강성 포강현으로 이주 15대(代)를 한울타리 안에서 동거하여 강남제일가를 이루고 69세 형부원외랑 신보(臣保)공은 남송(南宋)이 망할 무렵 서산 간월도로 망명(1237년)하여 인주수(麟州守)를 역임, 증 문하시랑평장사로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처음으로 전파하였다. 그의 아들 양렬공 인경(襄烈公 仁卿)은 서산정씨의 시조로 1256년 몽고군과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우고, 충렬왕(忠烈王)이 세자때 시종하였으며 1269년 기사년(己巳年)의 난을 평정 원종(元宗)을 복위시킨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었다. 또한 원(元)나라 황제로부터 무덕장군 정동성 이문관(武德將軍 征東省 理問官)에 임명되고 탁월한 외교로 동녕부(東寧府)와 유민을 되돌려 받았다. 그 공으로 서북면도지휘사에 특진되어 상장군, 찬성사를 거쳐 서산군(瑞山君)에 봉해지니 이때부터 서산정씨(瑞山鄭氏)가 되었고 폐군되었던 부성현이 서산군(瑞山郡)으로 승격복군(復郡)되었다. 1305년 벽상삼한삼중대광 추성정책 안사공신 도첨의중찬 (壁上三韓三重大匡 推誠定策 安社功臣 都僉議中贊) 벼슬과 별세 후 양렬공(襄烈公) 시호를 받았다. 후손 내암 정인홍(鄭仁弘)은 임진왜란 때 영남 의병대장으로 활약했으며 대사헌(大司憲)으로 국가기강을 바로 잡고 전후 복구사업에 치중하였다.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에 제수되었으나 사직상소를 올리고 합천에 퇴거 후진양성에 힘쓰니 세칭 산림정승이다. 인조반정 때(1623년) 억울한 누명을 썼으나 1908년 신원복작(伸寃復爵)되었다.","한글 성씨명":"정","한자 성씨명":"鄭"},"last_seen":"2026-09-21 05:49:44.554725+09"},{"record_key":"h:108b401382f022d465d04d0e20f99264","as_of":"2025-11-26","payload":{"문중명":"광주안씨","작품명":"안씨의 총서(叢書)","조각가":"안의종","작품설명":"광주안씨는 정충대절의 충신과 학문덕행의 학자와 공신을 배출한 문무겸비의 가문이다.\r 본 작품은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교지 형태로서 선조께서 조정에 나아가 진충보국 하셨던 충정을 표현하였으며,\r 좌측에는 대나무, 우측에는 매화를 두어 선비 정신을 상징화 하였다.","문중 유래":"조선 영조 15년, 서기 1739년 발간된 광주안씨세보(廣州安氏世譜, 己未大同譜)에 시조는 고려 태조 때의 안방걸(安邦傑)이며 경기 광주에서 읍인(邑人)이 반란을 일으키자 창의토평(倡義討平)한 공(功)으로 대장군(大將軍)이 되고 광주군(廣州君)에 봉(封)하여 광주(廣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기 1170년경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안유(安綏)가 안찰사(按察使)로 경남 함안(咸安)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고 안이대촌(安李大村, 安仁村)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시조이하 13世의 묘(墓)는 소재를 알 수 없어 함안군 가야읍 선왕동 봉산재(蓬山齎)에 설단향사(設壇享祀)하고 시어사공이하 4代는 삼봉산록(三蓬山麓) 건좌(乾坐)에, 20世까지는 안령사(按嶺祠)에 모셔있다. 이부총랑(吏部摠郞) 안정(安禎)의 후손은 경남 김해에, 고려의 멸망으로 탁질종신(托疾終身)한 중랑장(中郞將) 안국주(安國柱)의 후손은 함안에, 조선 태조 때 최초로 청백리에 녹선(錄選)된 사간공(思簡公) 안성(安省)의 후손은 광주에, 전농시판사(轉農寺判事) 안몽득(安夢得)의 후손은 조선 태종 때 의령(宜寧)에, 상호군(上護軍) 안충(安?)의 후손은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으로 종신(終身)하고 천안에 자리를 잡았으며, 위위주부(衛尉主簿) 안창(安昌)의 후손은 조선 단종 계유정란(癸酉靖란亂) 직후 밀양으로 이거(移居) 하였으니 이들은 여섯 파의 중시조(中始祖)이다. 후손들은 평소 학문을 연마하고 국난(國亂)때는 출정하여 나라를 지켰으며, 학자와 공신(功臣)들의 유적이 전해진다.","한글 성씨명":"안","한자 성씨명":"安"},"last_seen":"2026-09-21 05:49:44.554725+09"},{"record_key":"h:13f00252ed8bb38fc2668a0117657c54","as_of":"2025-11-26","payload":{"문중명":"함종어씨","작품명":"세계로 미래로","조각가":"어호선","작품설명":"예로부터 물고기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여러 문화와 종교에서 풍요와 생명력을 상징한다.\r 본 작품은 함종어씨의 한자 물고기 魚(어)를 모티브로 하여 형상화한 것으로 유려한 곡선으로 그 생명력과\r 역동성을 표현하였으며 가운데 3개의 구체는 알을 품고 있는 형상으로 함종어씨 자손들의 번영과 풍요로운 \r 미래를 기원한다.","문중 유래":"시조 호장동정(戶長同正)공 화인(化仁)은 고려명종 때 남송(南宋)에서 강릉을 거쳐 평안도 함종현에 정착하니 함종(咸從)이 어씨의 본관이 되다. 문정공 양숙공 현감공 훈도공 낭선공 사직공 한종공 한위공 8개파는 진주에 세거한 7세 준량(遵亮)의 후예이며 부정공파는 강릉에 세거한 3세 진승(振升)의 6대손 서운관 부정 덕상(德常)의 후예이다. 함종어문을 대표할 인물과 행적으로 9세 백유(伯游) 연(淵) 변갑(變甲) 3대가 시묘를 한 효행은 순효지문의 표상이며 집현전 직제학 변갑(變甲)은 중흥조로 조선 성리학 발전의 초석이 되고 이조판서 문효공 효첨(孝瞻)은 풍수소(風水疏)를 지었다. 함종부원군 문정공 세겸(世謙)은 좌의정과 양관대제학을 양숙공 세공(世恭)은 호조판서를 거친 적개공신으로 형제가 부조지전(不?之典)의 은전을 입고 위의 네 분이 모두 해동명신록에 오르다. 시문에 능한 대사간 득강(得江)은 갈천 운곡서원에 배향되고 영준(泳濬)은 청백리와 효행으로 명정되다. 야족당 숙권(叔權)은 패관잡기를 저술하고 수로 활용 전략가인 영담(泳潭)은 임진왜란 때 옥포와 당황포 해전에서 큰 전공을 세우다. 5만원권의 월매도는 조선 중기 문인화가인 몽룡(夢龍)의 작품이며 한명(漢明)은 병자호란때 강도일기를 쓰고 유봉(有鳳)은 조선 후기를 대표한 거유로 기원집을 남기다. 경종대왕 비 선의왕후는 함원부원군 유구(有龜)의 따님이고 대사간 유룡(有龍)은 암행어사로 명성이 높다. 충장공 재연(在淵)과 재순(在淳) 형제는 신미양요 때 강화도 광성진 전투에서 순절로 진충보국하고, 개화에 앞장선 탁지부대신 윤중(允中)의 경제론은 근대 경제학의 효시가 되다. 여성 독립운동가 이자 사회사업가인 윤희(允姬)와 독립운동에 헌신한 명철(命喆)·명준(命俊)·윤석(允奭)·경선(敬善)·중선(中善)·대선(大善)·봉선(鳳善) 등은 애국지사이다. 함종어씨는 승조 화합 참여의 정신으로 조상의 빛난 얼을 이어가고 있다.","한글 성씨명":"어","한자 성씨명":"魚"},"last_seen":"2026-09-21 05:49:44.554725+09"},{"record_key":"h:1606c3ae843d5a635726188439ac9dac","as_of":"2025-11-26","payload":{"문중명":"함안조씨","작품명":"飛上","조각가":"박대규","작품설명":"본 작품은 함안조씨 문중의 휘장인 독수리와 계수나무로 그 형상을 표상화하였고, 두 기둥은 충절과 신비의 기개를\r 상징하였으며, 양쪽 날개가 균형을 이루어 힘찬 날개짓으로 하늘로 웅비하는 형태는 함안조씨 종족의 \r 영원한 번영을 기원하였다.","문중 유래":"함안 조씨의 시조는 휘 정(鼎)이시다. 고려조에 대장군 원윤(元尹)을 지내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후손들이 함안에 세거하면서 함안(咸安)을 본관으로 하였다. 고려 왕조가 바뀔 무렵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킨 두문동(杜門洞) 72현 중 고죽재공 안경(孤竹齋公 安卿). 덕곡공 승숙(德谷公 承肅) 두 분과, 생육신(生六臣)의 한 분인 정절공 려(貞節公 旅), 또한 임진왜란시 황석산성에서 순국한 충의공 종도(忠毅公 宗道)와 다른 전장에서 순의(殉義)한 여섯 분을 포함한 열세 분 충신의 충절이 청사(靑史)에 길이 빛나고 있다. 간송당공 임도(澗松堂公 任道)는 조선중기의 이름난 학자이고, 충헌공 봉조하 중회(忠憲公 奉朝賀 重晦)는 조선조에 5판서를 역임하였으며, 문과급제 36인 외 도학문장가가 많이 배출된 문중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과 의정원의장을 지내고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주창한 소앙공 용은(素昻公 鏞殷), 일제 강점기에 일왕의 장인을 대만에서 자격(刺擊)한 명하(明河) 의사(義士)외 60여분 독립유공자들의 공적은 구국광복의 초석이 되었다. 현재 21원파 77지파의_후손들이 선대의 위업을 계승하고 있으며 백세청풍 숭조목종(百世淸風 崇祖睦宗)의 종훈(宗訓) 아래 조상의 유지(遺志)를 이어가고 있다.","한글 성씨명":"조","한자 성씨명":"趙"},"last_seen":"2026-09-21 05:49:44.554725+09"},{"record_key":"h:1613e9f2324bc94ff6cde7bc3937190f","as_of":"2025-11-26","payload":{"문중명":"신창노씨","작품명":"합일(合-一)","조각가":"김진기","작품설명":"본 작품은 유래비를 감싸 안은 듯 두 기둥의 선조와 후손의 화합을 상징하였다.\r 작품 중심부 투구는 신창노씨 선조의 武를 상징하였으며, 전체적 아치형 문(門)의 형태는 신창노씨 문중을 의미한다.","문중 유래":"신창노씨의 본관은 신창(新昌)이다. 신창은 백제의 굴직현(屈直縣)이었는데 신라경덕왕대에 기량현(祁梁縣)으로 온정군(溫井郡)에 속했다가 태종대에 온수현(溫水縣)과 합하여 온창(溫昌)이 신창현(新昌縣)으로 개칭 되었다. 신창노씨는 당(唐)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노수(盧穗)의 차남 노오(盧塢)가 통일신라에 귀화하여 교하백(交何伯)에 봉해진 데에서 연원되었다. 교하백 노오의 후손인 태자태사(太子太師) 삼한공(三韓公) 노강필(盧康弼)의 증손이며, 문하시중 평장사(平章事) 의정공(懿貞公) 노영순(盧永醇)의 차남인 노지유(盧智儒)는 검교장군(檢校將軍)으로 공적공훈(功績功勳)에 의하여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제수(除授)되었으며 신창(新昌)으로 봉득관(封得貫)하여 교하노씨(交何盧氏)에서 분관(分貫)되여 신창노씨의 득관조(得貫祖)로 그를 일세조(一世祖)로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문무(文武)의 인재(人材)를 배출시켜 명문(名門)으로 되었으며, 노지유의 육세손(六世孫)으로 어모 장군(禦侮將軍)에 제수된 노규부((盧赳夫)는 성종때 지방관아로 옮겨와 후손들이 대전광역시 유성구 문지동에 오백삼십여년을 살아왔으며 칠세손(七世孫) 건공장군(建功將軍) 노미수(盧眉壽)는 용장(勇將)이었으며 팔세손(八世孫) 부장공(部將公) 노식(盧軾)은 문무에 현달(顯達)하였고 단성현감 낙헌공(樂軒公) 노집(盧輯)은 청렴하였으며 후손들이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에도 세거하고 있다. 이처럼 역대의 역사가 담긴 뿌리 깊은 삶의 터전을 근대사의 정책에 의한 대덕연구단지 조성으로 인하여 1988년도에 주민 전체가 이주하여 후예(後裔)들은 충효(忠孝)의 정신(精神)으로 대전과 삼가를 중심으로 전국에 분포되어 살고 있다.","한글 성씨명":"노","한자 성씨명":"盧"},"last_seen":"2026-09-21 05:49:44.554725+09"},{"record_key":"h:1615c09568806ed2b177e687d20182da","as_of":"2025-11-26","payload":{"문중명":"청도김씨","작품명":"세계의 유산(대동여지도)","조각가":"신동수","작품설명":"본 작품은 고산지 김정호를 상징하는 대동여지도의 형상을 표현한 것으로 청도김씨 문중의 기개와 번영으로 청렴한 성품을 표한하였다.","문중 유래":"청도김씨 시조 영헌공(英憲公)의 휘(諱)는 지대(之岱)요 초휘는 중룡(仲龍)이며 경순왕(敬順王)의 9세손으로 고려 명종20년 1190년 청도 대성리에서 태어나시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힘써 육례지문(六藝之文)을 통달하였으며 공은 고종5년 강동지난에 태학생으로 대부종군하여 방패에 국환신지환(國患臣之患)이요 친우자소우(親憂子所憂)라 대친여보국(代親如報國)이면 충효가쌍수(忠孝可雙修)라는 순두시를 대서(大書)하여 종군하니 원수 조충(趙?)장군이 이를 보시고 경탄하였다. 개선하여 1219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전주사록을 시작으로 보문각교감, 진주목사를 거쳐 1240년 전라도안찰사로 이후 1258년 첨서추밀원사로 승진하시여 북계지병마사를 겸직하여 서북 40여성을 평정하였으며 이어 추밀원부사와 동지추밀원사를 거쳐 오산군(鰲山君)으로 책봉되었으며 1260년 정당문학 이부상서를 역임후 평장사(平章事)로 제수되었다. 이후 수태부중서시랑평장사(守太傅中書侍郞平章事, 正二品)로 치사(致仕)하시였으며 1266년 병인 2월 계사에 77세로 고종(考終)하시니 나라에서 영헌공이라 시호(諡號)를 내리셨다. 이후 명조(名祖)의 훈공(勳功)과 음덕이 후세에 뻗쳐 2세 휘 선장은 고려대호군이요 3세 휘 득제는 금자광록대부요 4세 휘 복기는 합문지후요 5세 휘 인수는 고려봉선대부요 6세 휘 한귀는 습봉(襲封) 오산군에 시(諡) 원정공(元貞公)이며 7세 휘 린은 봉상대부 지제고요 8세 휘 점은 의정부좌참찬에 시(諡) 호강공(胡剛公)이다. 8세 이하는 더 적지 아니하며 이와 같이 명경거공(名卿巨公)이 대를 이은 명문(名門)으로 후손이 창대하여 여경(餘慶)이 무궁하리라.","한글 성씨명":"김","한자 성씨명":"金"},"last_seen":"2026-09-21 05:49:44.55472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