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xis":"file_15150035","total":1032,"total_source":"catalog","limit":20,"offset":0,"items":[{"record_key":"h:001f419e0894e9024cd5f1623d7ad4d5","as_of":"2025-11-26","payload":{"유래":"정묘호란 때 아버지 독고행 아들 독고수와 함께 3대가 순절독고씨(獨孤氏)는 중국 고양(高陽:직예성 보정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라고 하며, 남원(南原),광릉(廣陵:중국)을 비롯하여 나주(羅州),황주(黃州),의주(義州)등 5본(本)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한다.남원독고씨(南原獨孤氏)는 중국 하남(河南) 출신의 독고공순(獨孤公舜)이 신라 말엽에 8학사(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정착 세거한것이 시원(始源)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대대로 이어온 사적이나 묘지를 알 수 없게됨)되어 계대(系代)를 잇지 못하다가, 그의 후손 독고신(獨孤信)이 학행(學行)으로 경향(京鄕) 각지에 명성을 떨치고,나라에 공을 세워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지자,후손들이 독고신(獨孤信)을 1세조로 받들며,남원(南原)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남원은 1910년 남원 48방을 22개면으로 통폐합하고,1914년 군면 폐합으로 남원군으로 개칭하였다.1981년에는 남원읍이 분리되었다가,1995년 남원군이 남원시에 통합되었다.남원독고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총 142가구에 452명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성씨 한글명":"독고","성씨 한자명":"獨孤","지역 한글명":"남원","지역 한자명":"南原"},"last_seen":"2026-09-21 05:51:50.028034+09"},{"record_key":"h:00dac2db0a146d48420052750fd39b7e","as_of":"2025-11-26","payload":{"유래":"인구조사에 의하면 충주주씨는1985년에는 총 3가구 25명,2000년에는 총 100가구에 327명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성씨 한글명":"주","성씨 한자명":"周","지역 한글명":"충주","지역 한자명":null},"last_seen":"2026-09-21 05:51:50.028034+09"},{"record_key":"h:0103ab983f8c0981389ef281892824b2","as_of":"2025-11-26","payload":{"유래":"영광정씨는 조선시대에 정중남(鄭仲男, 1611년생)이 1637년(인조15)별시(別試: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병년(丙年)마다 보던 과거)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의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영광(靈光)은 전라남도 북서부 해안에 인접한 영광군 일대의 옛 지명으로 940년(고려 태조 23)에 영광군(靈光郡)으로 바꾸었고,정주(靜州)또는 오성군(筽城郡)으로도 불리었다. 조선시대에도 영광군을 유지했고 1896년에는 전라남도 영광군이 되었고 1955년에는 영광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인구조사에 의하면 영광정씨는1985년에는 총 382가구 1,641명,2000년에는 총 3,367가구 10,939명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성씨 한글명":"정","성씨 한자명":"鄭","지역 한글명":"영광","지역 한자명":"靈光"},"last_seen":"2026-09-21 05:51:50.028034+09"},{"record_key":"h:0181de706eed4d23d1a6210b4c428fd0","as_of":"2025-11-26","payload":{"유래":"인제군 기린면 '청평(淸平)골'-산천이 청명하고 동네사람이 평안해져퇴계 이황 어머니 박씨부인춘천박씨의 1세조 박항(朴恒,자(字)는 혁지 革之)은 고려 고종때 문과(文科:대과)에 올라 한림원(翰林院)을 거쳐 충주목사(忠州牧使:정3품)와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종2품)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정2품 부총리)등을 역임하고 춘성부원군(春城府院君)에 봉해졌다.그는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의 29세손 경명왕의 일곱번째 아들인 강남대군(江南大君) 박언지(朴彦智)의 10세손(또는 11세손)이다.그가 충렬왕 때 왕을 호종(扈從:왕가를 뒤따르며 모심)하고 원나라에 다녀온 공으로 춘성부원군(春城府院君,춘성은 춘천의 별호)이 되자 후손들이 춘천에 세거하면서 춘천(春川)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관향인 춘천(春川)은 신라 경덕왕 때 삭주(朔州)라고 하였으며 후에 광해주(光海州)로 고쳤다. 고려 태조 23년에는 춘주(春州)라 칭하고 성종14년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어 안변부(安邊府)에 예속시켰으며 조선 태종13년에 춘천(春川)으로 고쳐 군(郡)이 되고 1895년 강원도 관찰사를 두었다. 1910년 도청소재지로 되고 1948년 춘천시(春川市)로 개칭 현재에 이르렀다. 춘천박씨는 장본파,월교파(月橋派),고탄(古呑)파,평천(平川)파,경주(慶州)파,노일(魯日)파,예천(醴泉)파,의성(義城)파,상주(尙州)파, 평해(平海)파, 영해(寧海)파, 건금(乾金)파, 약사(藥司)파, 봉산파(鳳山派) 등이 있다.춘천박씨(春川朴氏)는 관향인 춘천에 터를 잡아 세거해 왔으며,6세손 박영기(朴英奇)의 자손들이 양평(楊平),충주(忠州),청주(淸州),제천(堤川),중화(中和),황주(黃州)등지로 옮겨가 이들 지역에 산거하게 되었고,2세손 박원비(朴元庇)의 자손들은 예천(醴泉),의성(義城), 상주(尙州),울진(蔚珍)의 평해(平海),영덕(盈德) 영해(寧海), 봉산(鳳山),서흥(瑞興) 등지에 살았다.1930년경 춘천박씨의 자손들은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江上面),강원도 춘성군(春城郡) 일원,춘천시(春川市) 일원,경북 상주군 모서면,울진군 북면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현재는 춘천,홍천,인제(麟蹄) 등에 주로 세거하고 있다. 춘천박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5명,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8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5명 등 모두 18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인구조사에 의하면 춘천박씨는1985년에는 총 3,096가구 12,885명,2000년에는 총 5,274가구에 16,860명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성씨 한글명":"박","성씨 한자명":"朴","지역 한글명":"춘천","지역 한자명":"春川"},"last_seen":"2026-09-21 05:51:50.028034+09"},{"record_key":"h:0186d3e2a48388232dce657b735f41ee","as_of":"2025-11-26","payload":{"유래":"비안라씨는 2000년에는 총 130가구에 418명이었다.비안은 경북 의성군 비안면 일대의 옛 지명으로, 비옥(比屋)과 안정(安貞) 2개현을 합명한 것이다.1421년(세종 3)에 안정현과 합하여 안비현(安比縣)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896년에 경상북도 소속이 되었다.그 후 1914년에는 군면 폐합으로 현서면(縣西面)은 예천군에 속하고 나머지는 의성군에 병합되어 비안군은 폐지되고 의성군(義城郡) 비안면(比安面)으로 편입되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성씨 한글명":"라","성씨 한자명":"羅","지역 한글명":"비안","지역 한자명":null},"last_seen":"2026-09-21 05:51:50.028034+09"},{"record_key":"h:0199a4288bc9ef85dddc22df4442395d","as_of":"2025-11-26","payload":{"유래":"학성(鶴城)은 경상남도에 위치한 울산(蔚山)의 옛 이름으로 임진왜란중인 1598년(선조 31)에 울산도호부(蔚山都護府)로 승격되어 병마절도사(兵馬都節制使:육군을 지휘하는 종2품무관)가 부사(府使:정3품수령)를 겸하게 되었다가,1616년(광해군 8)에 다시 별도로 부사를 파견하였다. 1896년 경상남도 울산군이 되었다. 고려 성종때, 울산의 별칭을 학성(鶴城)이라고 하였다. 1962년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의해 울산읍을 시로 승격하였다. 1995년에 울산시와 울산군을 통합하고,1997년 울산광역시로 출범하였다.학성정씨는 정송(鄭松)을 시조로 받든다.그는 초계정씨(草溪鄭氏) 시조 정배걸(鄭倍傑)의 손자로 고려조에 시중(侍中: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하던 종1품 정승)을 지냈다고 한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학성(鶴城)을 관향(貫鄕)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인구조사에 의하면 학성정씨는1985년에는 17가구 75명,2000년에는 91가구에 269명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성씨 한글명":"정","성씨 한자명":"鄭","지역 한글명":"학성","지역 한자명":"鶴城"},"last_seen":"2026-09-21 05:51:50.028034+09"},{"record_key":"h:01c7abae7cc9ab04efd9ec7022bd11b5","as_of":"2025-11-26","payload":{"유래":"영산김씨(靈山金氏)는 김 순(金淳)을 시조로 받든다.시조 김 순(金淳)은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대안군(大安君) 김은열의 후손 김석아(金錫我:시호는 희헌)의 아들이다.다른 문헌인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는 시조 김순(金淳)의 본관이 의성으로 되어 있어,후손들이 의성김씨(시조 김석)에서 분관한것으로 되어있으나,문헌에는 대안군(大安君) 김은열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어 자료발굴을 통한 연구가 필요하다.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은 조선시대 태조때부터 영조때까지 역대 문과급제자의 인명록으로 16권 8책의 사본이며, 과거급제자의 성명.계통.연령.본관 등을 수록한 책이다.영산(靈山)은 경남 창녕군 일대의 옛 지명이다.1895년(고종32)경상남도 영산군이 되었다가 1914년에 군.면 폐합으로 영산군이 폐지되고 일부는 함안군에 편입되고 읍내면이 영산면으로 개칭되어 나머지 6개 면과 함께 창녕군에 통합되었다.인구조사에 의하면 영산김씨(靈山金氏)는1985년에는 247가구 1,134명이었으며,2000년에는 총 596가구 1,900여명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성씨 한글명":"김","성씨 한자명":"金","지역 한글명":"영산","지역 한자명":"靈山"},"last_seen":"2026-09-21 05:51:50.028034+09"},{"record_key":"h:01f258cefd6d21bcc44b4b8a2af3cb70","as_of":"2025-11-26","payload":{"유래":"파릉초씨(巴陵楚氏)의 본관지 파릉은 악양(岳陽)의 옛 지명으로 중국 호남성 북동끝에 있는 악양 지구의 현공서(縣公署)소재지이다. 그곳은 동정호(洞庭湖)의 물이 양자강(揚子江)으로 흘러나가는 출구에 위치하여 양자강의 수운(水運)과 경광철도(景廣鐵道) 육운(陸運)이 겹쳐 있어 호남성의 관문 구실을 한다.남북조(南北朝)시대부터 있어온 옛도시로 악주성(岳州城) 서문(西門)에 있는 악양루(岳陽樓)는 동정호와 양자강을 전망하는 웅대한 경관으로 유명하다.초씨(楚氏)는 중국 강릉(江陵)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며, 우리나라 초씨(楚氏)연원은 서기1644년(인조22) 명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고려때는 문신가운데 뽑힌 뛰어난 학자로서 한림원.수문전 등의 종2품,정4품)초해창(楚海昌)이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새로 들어서자 불사이군(不事二君:한사람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함)의 충절로 우리나라에 망명하였다.그는 조선에 들어와 충의장군(忠義將軍:서경 만호부(西京萬戶府)산하의 군대 조직의 하나이며 정4품)으로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졌으며,성주(星州)에 정착한 것이 시초가 된다.그후 아들 초수명(楚壽命)이 청나라가 밀파(密波)한 자객(刺客)을 피하여 명자가 붙은 고을을 찾아 함북 명천(明川)에 은거한 후,자손들이 번창하여 초해창(楚海昌)을 시조로 받들고 선조의 옛 고향인 파릉(巴陵)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초씨(楚氏)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등의 문헌에는 성주초씨(星州).청주초씨(淸州).강릉초씨(江陵)이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가 같은 뿌리이며 현존하는 관향(貫鄕)은 파릉초씨(巴陵楚氏) 단본이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성씨 한글명":"초","성씨 한자명":"楚","지역 한글명":"파릉","지역 한자명":"巴陵"},"last_seen":"2026-09-21 05:51:50.028034+09"},{"record_key":"h:01f3653106de09486688bc7cd14709a1","as_of":"2025-11-26","payload":{"유래":"우리나라 지씨(智氏)는 봉산지씨(인구 6,098명).봉주지씨(봉산지씨와 같음, 616명).용강지씨(1명).제천지씨91명).파주지씨(1명)등 총 5개의 본관에 2000년에는 6,748명이었다.그러나 봉산지씨 이외는 세거지명이라고 한다.봉산지씨(鳳山智氏,봉주) 시조 지채문(智蔡文)은 고려때의 명장이다. 시조 지채문의 선계(先系)에 대해서는 고증할 문헌을 잃게 되어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지채문(智蔡文)은 1010년(고려 현종 원년) 거란군이 내침했을 때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또 왕의 피난길을 호종(扈從:왕가를 뒤따르며 수행함)한 공으로 토지를 하사받고 무관으로서 우상시(右常侍:문하부 간관 벼슬)를 겸직했다.후에 상장군(上將軍정3품 중앙군 최고지휘관)에 오르고 좌복야(左僕射:상서도성의 정2품 부총리)에 이르러 덕종이 즉위하자 일등공신에 추록되었으므로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받들고 관향을 봉산(鳳山:봉주의 별호)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조선씨족통보>에는 지씨(智氏)의 본관을 13본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현존하는 관향은 봉주(봉산) 단본으로 전한다. 인구조사에 의하면 봉산지씨는1985년에는 713가구에 2,894명이었으며,2000년에는 1,903가구 6,098명이었다.봉산(鳳山)은 황해도 은파군과 봉산군 지역 옛 지명으로,충렬왕때 봉양군(鳳陽郡)으로 고쳐 지사(知事)를 두었다.1413년(태종13)에 봉산군으로 고쳤고,1947년에 사리원면이 사리원시로 승격하면서 봉산군에서 분리되었다.1982년 10월에는 해서리가 사리원시에 포함되는 대신 은파군의 청룡리가 봉산군에 이관되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성씨 한글명":"지","성씨 한자명":"智","지역 한글명":null,"지역 한자명":null},"last_seen":"2026-09-21 05:51:50.028034+09"},{"record_key":"h:01f50d7b5e24306ca26dd5e9b205922b","as_of":"2025-11-26","payload":{"유래":"무장(武將)의 산실,옥편의 효시인 자전석요(字典釋要)와 종두실시 지석영대한독립군단 조직,항일전 수행한 독립운동가 지청천충주지씨(忠州池氏) 시조 지경(池鏡, 903~1003,호 암곡,자 자운,시호 선의)은 중국 송나라 중원 홍농인으로 서기 960년(고려 광종11년)에 우리나라에 귀화했다.당시 태학사(太學士:조선때의 대제학을 달리 부르는 말)로서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우리나라에 정착 귀화했으며,고려조에서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문관의 종2품)로 평장사(平章事:정2품부총리)에 올랐으며,뒤에 태자태보(太子太保:정1품)에 이르렀다.지경(池鏡)의 6세손인 지종해(池宗海)가 충주에 살았으며 고려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문하부의 정2품부총리)를 지내고 충주백(忠州伯)에 봉해져 후손들이 충주를 본관으로 하였다.한편 충주지씨(忠州池氏)였다가 고려 태조에게 충주어씨(忠州魚氏)로 성(姓)을 하사 받은 어중익(魚重翼)도 충주지씨 6세손이다.(충주어씨 참조)충주지씨대동보(忠州池氏大同譜)에는 지경(池鏡)의 아들에 찬성사(贊成事:문하부의 정2품 부총리)를 지낸 지해관(池海貫)과 평장사(平章事:중서문하성의 정2품부총리)를 지낸 지도관(池道貫)형제가 있고,지해관의 아들로 안렴사(安廉使:지방장관으로 절도사.안찰사)를 지낸 지윤(池胤),부원수(副元帥:전시에 두던 임시벼슬 상원수 다음)를 지낸 지영(池瀛)형제가 있으며,부원수 지영의 아들에는 평장사(平章事:중서문하성등의 정2품부총리)를 지낸 지득상(池得尙)과 찬성사(贊成事:고려때 문하부 정2품부총리)를 지낸 지응상(池應尙)이 있으며 지득상의 손자가 평장사(平章事:정2품) 지종해이고,지응상의 손자가 지중익,즉 평장사(平章事:중서문하성 정2품부총리)를 지낸 어중익으로 기록되어 있다.시조 지경의 묘는 평안도 중화 당악산 화산정에 있다. 지씨는 고려조에 많은 인물을 배출한 명문 거족으로 발전하였는데 고려말 지문사걸(池門四傑)이라 하여 원(元)의 세력과 왜구(倭寇),홍건적(紅巾賊) 등을 물리치는데 공(功)을 세운찬성사(贊成事:정2품부총리)지윤(池奫),상원수(上元帥)충의공(忠懿公)지용도(池龍圖),충무공(忠武公)지용수(池龍壽)형제및 충원부원군(忠原府院君)지용기(池湧奇)등이 있다.지윤(池奫)은 우왕때 서북면도원수(都元帥:전시에 두던 임시총사령관)가 되었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정2품 부총리)에 올라 명성을 떨쳤다.특히 지용수(池龍壽)는 고려 공민왕때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서북면지방에 두어 병마를 지휘하던 종2품)로 홍건적을 물리쳐 1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또한 지용기(池湧奇)는 고려 우왕때 이성계 휘하에서 위화도 회군에 참가하여,후에 충원부원군(忠原府院君)에 봉해져 충주지씨(忠州池氏)가문을 빛냈다.효행(孝行),충절(忠節),문학(文學)에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던 충주지씨는 임진왜란때 공을 세운 판결사(判決事노비문서 등을 관장한 장례원의 정3품) 지하복(池河福),분의장(奮義將) 지달원(池達源)과 별장(別將:용호영의 종2품,산성.포구.소도 등의 수비를 맡던 무관의 종9품)을 거쳐 철산도호부사(都護府使:도호부를 다스리던 종3품)로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에서 청군과 싸우다가 순절하여 병조참판(兵曹參判:종2품국방장관)에 추증된 지여해(池汝海)등이 역사에 기록된 인물들이다.문장에도 뛰어나 학명으로도 이름이 높았던 지달원(池達源)은 임진왜란때 함경도에서 정문부(鄭文孚:북관대첩비의 주인공,2006년 일본에서 승전비를 100년만에 반환해옴,해주정씨 참조).최배천 등과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웠다.이밖에 충성군(忠城君) 지계최(池繼 )가 도원수(都元帥:총사령관) 장만(張晩)휘하에서 활약하였으며,지덕해(池德海)는 병자호란때 큰 공을 세워 이름을 날렸다.구한말에 널리 알려진 지석영(池錫永)은 충주지씨가 자랑하는 근대 인물이다.그는 우두법을 처음으로 보급한 의학자로 유명하다.지석영은 1876년(고종13) 수신사(修信使:고종 13년 이후에 일본에 보내던 사신) 김기수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다가 종두법을 배워 온 박영선에게 종두법을 익혔으며 김홍집(조선 마지막 영의정이자 초대 총리대신)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우두법을 익히고 돌아왔다.전주(全州) 등지에서 우두국을 설치하여 종두의 전국 보급을 시작하였으며 <우두신설>을 저술하여,국민보건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또한 그의 형인 지운영(池運永)은 학문과 예술에 정진하여 시·서·화의 삼절로 불리워졌으며 특히 서화가(書畵家)로 유명했다.한말의 의병장 지홍문은 1907년(순종1) 군대 해산령이 내리자 의병을 일으켜 강화 갑곶(江華甲串)에서 일본군 1개 중대를 섬멸했으며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지청천(池靑天:일명 이청천)은 3·1운동이 일어난 뒤 만주로 망명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였고,청산리 전투후에는 일본군의 보복작전을 피해 흑룡강으로 이동하여 김좌진 등과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여 항일전을 수행하였다.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되었고 일본군에 의한 만주대학살때 순국한 지하영(池霞榮)과 함께 명문 충주지씨 가문을 더욱 빛냈다.충주지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문관을 뽑기 위하여 보던 과거로 대과)10명,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였으며 3년마다 보았음)에 39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는 시험)에 31명,역과(譯科:중국어.몽고어.일본어.여진어에 능통한 사람을 역관으로 뽑기 위하여 보던 과거)에 1명,음양과(陰陽科:천문.지리.명과학(命課學)에 밝은 사람을 뽑기 위하여보던 과거)에 14명,율과(律科:형률에 능통한 사람을 등용하던 과거)에 5명 등 100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인구조사에서 충주지씨는1985년에는 28,314가구에 118,430명,2000년에는 36,937가구 118,211명이었다.충주(忠州)는 충청북도 중앙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983년(성종2)충주목(忠州牧)이 되었다. 995년(성종14) 창화군(昌化軍)으로 바꾸고 절도사(節度使:종2품)를 파견하여 중원도(中原道)에 속하게 하였다. 1395년(태조4)에 충청도관찰사를 두었으며,1896년 13도제 실시로 충주부가 폐지되었고 충청북도의 도청소재지가 되었다. 1908년(순종 2)도청을 청주로 이전시키고 군수(郡守:종4품수령)를 두었으며, 1995년 충주시와 중원군이 통합하여 충주시가 되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성씨 한글명":"지","성씨 한자명":"池","지역 한글명":"충주","지역 한자명":"忠州"},"last_seen":"2026-09-21 05:51:50.028034+09"},{"record_key":"h:022a261bbcbb195d3d74543f3749511b","as_of":"2025-11-26","payload":{"유래":"국난극복의 인물,임진왜란 때의 명장 김태허(金太虛)김상윤 김진성 등 항일투사 배출 충절의 전통 이어와광주김씨(廣州金氏)는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진 김녹광(金祿光)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시조 김녹광은 신라 경순왕의 다섯째 아들인 의성군 김석(金錫)의 7세손이다.그는 고려 고종4년 부사(府使:3품수령)를 지내고 1236년(고종 23)에 몽고군이 침입해 왔을 때 상장군(上將軍:중앙군의 정3품)으로 출정하여, 몽고군을 격퇴시켜 이름을 날렸으며 후에 광주군(廣州君)으로 봉해졌다.그래서 후손들이 광주(廣州)를 본관으로 삼고있다. 김녹광의 아들인 김굉이 감찰어사(監察御史:감찰부의 종6품)를 지냈으며 김굉의 아들 둔촌 김훤은 당대의 명신으로 명성을 떨쳤다.김훤은 고려 원종때 문과(文科:문관을 뽑던 과거로 3년마다 실시됨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로 나뉜 대과)에 급제하고, 1269년(원종10) 사신으로 원나라에 들어가 원나라 황제의 힘을 빌려 권신 임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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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개의 본관에 인구는 2000년 조사 때는 총 426,927명이었다.문씨(文氏)는 문헌에는 156본까지 기록되어 있으나, [감천]과 [정선]을 제외한 본관은 남평문씨(南平文氏)의 세거지명으로 알려져 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성씨 한글명":"문","성씨 한자명":"文","지역 한글명":null,"지역 한자명":null},"last_seen":"2026-09-21 05:51:50.028034+09"},{"record_key":"h:032f27deea71b1d0f72673d625add2e2","as_of":"2025-11-26","payload":{"유래":"후백제의 명장 추허조 배출추씨(鄒氏)는 중국 범양(中國范陽:경조성 순의현)에서 계출된 성씨(姓氏)로 한나라 헌제(獻帝:후한의 마지막 황제, 재위 190-219)때 어양태수(漁陽太守:군의 으뜸 지방관)를 지낸 추 단(鄒丹)의 후예로 전한다.우리나라 추씨(鄒氏)는 고구려 대무신왕때 비류부장(沸流部長)을 지낸 추발소(鄒勃素)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되어 있으며,후백제 견훤(甄萱)의 부하장수로 고려 태조 왕건과의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추허조(鄒許組)가 문헌에 전해진다. 추씨(鄒氏)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 국세조사 당시 경북 상주에 1가구가 살고 있었고,1985년에는 한국에 25명이었으며,2000년 인구조사에서는 642명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성씨 한글명":"추","성씨 한자명":"鄒","지역 한글명":null,"지역 한자명":null},"last_seen":"2026-09-21 05:51:50.028034+09"},{"record_key":"h:036672addd5e9b66c62c900b77571bda","as_of":"2025-11-26","payload":{"유래":"<칠원윤씨 대종회>의 유래에 대한 기록과 문헌에 의하면,칠원윤씨(漆原尹氏)는 무열왕때 태자태사(太子太師:삼공(태사.태부.태보)의 하나로 정1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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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著書) 남겨동생 김정국은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호당(湖堂)에 뽑힌 수재'북천가'의 저자 김진형은 국문학사상에 중요한 업적 남겨의성김씨(義城金氏)는 경순왕의 다섯째 아들인 김석(金錫)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시조 김석(金錫)은 고려 태조 왕건의 외손(外孫)으로,왕건의 딸 신란공주(일명 낙랑공주)가 어머니이다. 신란공주(神鸞公主)는 왕건의 셋째부인 신명태후(神明太后)충주유씨(忠州劉氏)의 소생이다. 이로써 고려 왕건 태조의 외손이며 2대 혜종(惠宗),3대 정종(定宗),4대 광종(光宗)의 생질(甥姪)이다. 시조 김석은 고려 초 무신(武臣)정치시대에서 벗어나 널리 인재를 등용하는 문치(文治)시대로의 전환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으며, 국방(國防)과 백성들의 구휼(救恤)에 공을 세워 경종때 식읍(食邑나라에 공을세운 사람에게 고을의 조세를 개인이 받아쓰게 하는것)300호를 하사 받고 의성군(義城君)에 수봉되었으며,제8대 현종때 덕유후(德儒侯)의 작위를 받기도 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의성(義城)으로 삼았으며 그 뒤 여섯명의 선조들이 의성군(義城君)에 봉군(封君)되었다.한편,의성김씨족보에는 시조 김석(金錫)이 경순왕의 넷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등의 문헌(文獻)에 다섯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어,그동안의 통설에 따라 이책에서는 다섯째 아들로 기술한다.의성김씨(義城金氏)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96명,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33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시험)에 265명,역과(譯科:조선시대의 잡과의 하나로 중국어.몽고어.일본어.여진어 능통한 사람을 역관(譯官)으로 뽑아 쓰기 위하여 보이던 과거)에 4명,의과에 9명,율과(律科:조선시대에 형률에 능통한 사람을 등용하던 잡과(雜科)의 한 가지)에 3명 등 410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였다.인구조사에 의하면 의성김씨(義城金氏)는 1985년에는 53,633가구 219,947명이었으며,2000년에는 79,360여가구 253,300여명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성씨 한글명":"김","성씨 한자명":"金","지역 한글명":"의성","지역 한자명":"義城"},"last_seen":"2026-09-21 05:51:50.028034+09"}]}